동네 뒷산을 따라 고양이 급식소의 밥을 챙기는 것으로 윤선의 하루는 시작된다. 남편 윤재는 본인의 뱃속보다 고양이의 끼니를 우선하는 윤선이 못마땅하지만 무심한 척 뒤에서 돕는다.
둘은 집 뒤의 빈 공터에 집을 짓기로 한다. 공터는 이미 동네 고양이의 아지트. 그들의 보금자리를 해치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사람과 동물이 어울려 집을 짓는 일은 가능할까?
연출의도
“사람”이란 단어, 그리고 동사 “살다”라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하였는데, 이는 “불사르다”라는 의미이다. 옛사람들은 “삶”이란 불타는 과정이며 “사람”이란 활활 타는 존재로 여겼는 듯 하다.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분명 숨을 쉰다는 행위는 연소하고 산화되는 과정이므로, “사람 = 불타는 존재”라는 명제는 오류가 아니다. 그렇다 살아있는 존재는 뜨겁고, 뜨거워야 잘 사는 것이다.
세상에 홀로 사는 이는 없다. 가깝게는 부모님에서부터 이웃사촌, 멀게는 지구 반대편에서 스페인어로 말하는 남미인까지 우리는 지구 안에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보다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면 가로수와 그 밑에 웃자란 잡초까지도 범지구적 이웃이라 할 만하다. 그들이 사라지면 우리의 삶도 위태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