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A는 이별 후 연애에 의지하는 삶의 방식을 바꿔 보기 위해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서 연애와 비슷한 안정감과 외로움을 느끼던 A는 과거 안정감의 대상이던 연인 C를 만난다.
C와의 관계에서 불안함을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반복적으로 불안함을 재생산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느낀 A는 다시 교회로 향하고 마지막으로 기도한다.
연출의도
실존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랑은 불안함을 채우기 위한 본질의 한 모습에 불과하다. 태생적으로 불안을 품고 사는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필연적인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하지만 필연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대부분 좌절로 이어진다. 필연성을 이겨내는 방법은, 거기서 벗어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에 있다. 노년의 무상함을 견디며 살아갈 힘이나 이별의 두려움을 버틸 수 있는 강인함은, 죽음이나 이별과 같은 끝을 선구하는 데에서 온다.
안타깝게도, 이 끝에 대한 선구는 즉각적인 고통을 동반하기에 사람이 본능적으로 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필연인, 존재적 불안함에 대해 조금 더 편한 전략을 모색한다.
이 존재적 불안함에 대해 우리가 흔히 취하는 전략은 존재적 불안함을 당장 해소해 줄 수 있는 어떤 역할 뒤에 숨는 것이다. 그 역할은 종교, 이성, 직업, 관계 등으로 다양하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평생의 소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사물적인 본질은 실존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질적 불안함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차선책에 불과하다. 혹은,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도약을 방해하는 방해물 일수도 있다.
관계나 종교 뒤에 숨어 홀로 서는 법을 잊은 사람이, 오래 전 나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던 본질을 마주해 그것을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는 홀로섬에 한 발 더 가까워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