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가인 은새는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 되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미술 작가로서의 자신의 능력과 성공에 대한 믿음을 갖던 은새는 성과 없이 한 해 두 해가 지나가자 점차 자신감을 잃어간다. 친구들은 사회인이 되고, 부모님은 은새에 대한 기대를 줄여가지만, 은새는 성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새의 우울감이 극에 달하고 그녀는 더 이상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은새는 어린 시절 사진들을 꺼내보다가 자신이 옛날에 사용하던 오래된 폴더폰을 발견한다. 은새는 운명처럼 맞이한 폴더폰을 자신의 부적으로 삼고, 노력이 안 통한다면 운을 키워보자는 의지를 갖는다.
은새는 자신의 그림으로 부적을 그려 오래된 폴더폰의 배경화면으로 설정한다. 그러자 우연인지 운명인지 한 미술 비평가에게 전화가 온다. 그는 자신이 유명한 비평가이며, 은새 작가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어필한다. 은새는 의문스럽지만 자신이 부적 휴대폰 덕분에 운이 좋아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은새는 밖에서 길을 걸을 때에도 부적 휴대폰을 들고 다닌다. 은새는 길에서 번호를 따이는 등의 소소한 행운에도 큰 만족감을 느낀다.
은새는 아예 부적 휴대폰을 위한 제단을 만든다. 그것은 하나의 설치미술 작품처럼 보인다. 은새는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부적 휴대폰을 위해 제단에 공을 들인다. 그 순간 방문을 예고했던 비평가가 갤러리 대표와 함께 찾아온다. 그들은 은새의 회화 작품들이 생각보다 별로라고 말하며 실망한다. 알고보니 그들은 ‘이은새’ 작가를 찾고 있었고, 그들의 방문은 비평가의 실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갤러리 대표는 부적 휴대폰 제단을 보고 완전히 매료되어 은새에게서 그것을 구매하려 한다. 은새는 이를 통해 부적 휴대폰이 자신에게 운을 가져다 주었음을 확신하며 판매를 거절한다.
은새는 이제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자신의 운이 높아져서 더 큰 문제로 커지지 않았다고 받아들인다. 은새는 부적 휴대폰 제단을 위해 가벽을 옮기다가 실수로 자신이 수 개월 작업한 그림을 훼손하게 된다. 은새는 속상하지만, 이것이 부적 휴대폰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새는 과감히 그 작품을 찢어 부적 휴대폰에게 바친다. 은새는 자신의 운을 더 높이기 위해 새로운 행운 상징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그 중 하나를 천장에 달다가 떨어져 다리를 다치기도 한다. 역시 이번에도 은새는 자신의 행운 덕에 덜 다쳤다고 믿는다.
깁스를 한 은새가 작업실로 돌아온다. 작업실의 문이 누군가 침입을 시도한 것처럼 느껴지고, 은새는 부리나케 작업실로 뛰어들어간다. 부적휴대폰과 다른 오브제들이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된 은새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행운을 뺏길 것이 두려워진다. 은새는 빛이 새어나오는 창문들을 가리고 행운 오브제들 사이로 들어간다. 은새는 자신이 그들을 지키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버린다.
연출의도
우연적으로 마주친 것이 운명이 된다면 그것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우연과 운명은 오랫동안 철학적 화두로 제시되어왔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인지, 이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 속에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우연이라면 인간은 자신이 발 디딜 땅을 잃지만,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반대로 운명이라면 인간은 능동성을 잃지만 운명이라는 큰 흐름 속에 놓이게 되며, 하나의 과정 속에서 (그래도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게된다.
요컨대 삶이라는 안개 덮인 길 속에서, 우연을 믿는 사람은 보이진 않지만 앞을 향하고, 운명을 믿는 사람은 걸어온 길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무엇이 맞냐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같은 것을 우연으로도, 운명으로도 볼 수 있다.
주인공 ‘은새’는 스스로의 예술성에 확신을 갖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시간이 지속되고, 은새는 자신이 성공할 것에 대한 확신을 차차 잃어가게 된다. 이때 은새는 자신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운을 탓하기로 한다. 즉, 이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어쩔 수 없는 우연(운)의 부조리함에 분노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필요에 의해서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과정을 시작한다.
현대에는 운명론이 지배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자유 의지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노력보다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패배감이 젊은이들을 분노케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들이 우연인 세상에서 다시 운명론적 세계관을 일부 들여오고 싶을지도 모른다.
은새에게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매개체는 오래된 물건, 그리고 디지털이다. 우리는 때로 오래된 물건들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 축적된 오래된 물건들은 과거(운명이 되어버린 것)과 현재(우연들)를 이어줄 수 있다. 또한 디지털은 영원성,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면서도 일순간 모든 연결이 끊어질 수 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이어지는 디지털의 연속성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이라는 영화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은새는 (자신이 운명이라고 느낀) 오래된 휴대폰으로 부적을 만들고, 거기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행운이 겹쳐지면서 점차 그 오브제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기댈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말하자면 은새가 만들어낸 부적은 인간이 창조한 신에 가깝다. 은새는 부적 휴대폰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숭배한다. 그러자 부적 휴대폰은 점차 은새를 넘어서 스스로 살아숨쉬는 형상을 갖춰간다.
그러나 디지털은 애초부터 0과 1로 이루어진 불연속체이고,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혼자 운명을 믿기로 했다한들 결국 은새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운명론은 분명 개인에게 위안을 주지만, 그것의 맹점은 무엇이든 운명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믿기로만 한다면 모든 우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은새는 마치 사이비의 역설처럼,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운이 높아진 결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은새는 자신이 아끼던 작품이 훼손되어도,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도 더 큰 화를 면한 것으로 이해하는 수준이 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우리 또한 은새의 이러한 맹신이 잘못되었다고 확증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인간의 지각 내에서는 은새가 정말 더 큰 화를 면한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그녀가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일종의 ‘믿음’이며 그녀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은새의 맹신을 잘못되었다 여긴다면, 그것은 현재 우리의 전제가 우연성에 근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은새의 행운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녀를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점차 망가져가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삶 속에서 관객들이 자신들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지배적인 우연, 그리고 운명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