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은 감독으로부터 실패한 시나리오를 하나 받는다. 유림은 혼자서 그것을 읽고, 연기한다. 혹은, 어쩌면 그것들은 여러 의미에서 연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연기 후에는 유림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한다. 혹은, 어쩌면 그것들은 유림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또 한편, 유림은 시나리오북 여백에 노트를 쓴다. 혹은, 그것들은 차라리 시나리오 다시 쓰기 또는 이어 쓰기일지도 모른다. 혼자 시나리오 속 인물들의 말과 행위와 고민을 떠안는 유림은 이제 그만 이 미완의 픽션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벗어난다고 말하기에는, 애초에 이 영화에서 유림의 연기는 한 번도 제대로 행해지거나 장면 안에 온전히 자리 잡은 적조차 없다. 유림(들)은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할 수 있는 걸까.
연출의도
이러한 실패의 시간들 위아래에서 부유하며, 자신을 포함한 시나리오 안팎의 인물들의 마음들로부터 유림이 겨우 건져낸,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함께, 우리는 사라지면서 등장할 수 있을까? 소리들을 따라 침묵에 도착할 수 있을까? 멈추지 않지만 정지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아도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실패하면서도 믿을 수 있을까? 무엇도 확신하지 않기 위한 그 믿음의 시간이 얼 때 그 위에서 우리 스스로 직립하고, 녹을 때 그 아래에서 우리 서로 기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