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 어릴 때부터 함께 있던 친구가 있다. 머리카락을 뜯는 내 친구가 이상하다. 다음날엔 손가락을 깨물어 피가 흐른다. 피를 닦아주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연출의도
사물 의인화의 시작은 무분별하게 버려지고 쌓이는 쓰레기를 마주했을 때이다. 그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얘네도 어디서 여러 시간을 거쳐 의도하지 않은 이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점을 더듬고 싶었다.
11살 이전까지 무의식 속 상상 친구가 있다고 한다, 스티커를 붙여주고 꾸며주는 사물들이 어릴 적 상상 친구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냥 친구가 아닌 ‘선한’ 친구이다. 이것은 사물들의 허물없음이다. 이들은 그곳에 있을 뿐이고 의도는 없다. 동시에 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이다.
어른이 된 주인공의 표정은 냉소적이다. 행동만으로 친구, 애인, 동생, 가족 등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둘 사이의 관계는 명명할 필요성을 상실한 사물과 사람의 관계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은 기능이 고장나면, 그때 자신의 존재를 엄습해온다고 했다. 영화 속 선풍기는 고장나지 않았다. 존재성을 인지하기도 전에 버려진 선풍기는 바깥 바람에 날이 돌아간다. 그 미련은 잃어버린 작은 추억에 잠겨있다.
끝없이 흩어진 사물들에게, 상상 친구를 잃어버린 나의 과거에게 과하지 않는 온도의 편지를 전한다. 나만의 것이지만 우리의 이야기이자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