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교단을 떠나려는 연극과 교수 주희는 건강검진 결과, 가슴에서 악성이 의심되는 종양을 발견한다. 주희는 그것이 암이라고 확신한다. 그도 한때는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을, 그리고 좋은 선생을 꿈꿨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지치고 힘들다. 신변 정리를 위해 학교를 찾은 연구실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찾아온다.
극단 정적의 연출가인 호진은 초연을 앞둔 연극 준비로 분주하다. 그리고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장면은 공연을 앞둔 당일까지도 그를 괴롭힌다. 극단의 젊은 단원들은 ‘중년 부부의 위기’를 다룬 호진의 희곡이 그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며 숙덕거린다.
Review 제목부터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오마주하듯,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역시 죽음의 불안을 맞닥뜨린 여인의 두 시간을 보여 준다. 클레오와 주희는 젊은 여성과 중년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겠지만,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걷고, 걷지 않음에 있다. 죽음을 인식한 클레오는 하염없이 걸으며 파리를 배회한다. 바르다의 말에 따르면, “단 한 번도 벌거벗은 적이 없는 클레오”는 동적인 파리 안에서 맞닥뜨리고, 흔들리며 거울에서 벗어나 역설적으로 생에 대한 에너지를 획득한다. 그러나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는 그러한 운동성이 없다. 죽음을 인식한 주희는, 불안해하면서도 자신이 자리해야 할 곳에 묵묵히 자리한다. 주희가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은 역으로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다. 생의 활력보다는 죽음의 고요 안에서 시간과 순간에 성실한 주희의 침착함은 클레오와는 상반된 삶의 리듬을 보여 준다.
*관객기자단[인디즈]_진연우
연출의도
개인의 삶은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누구라도 그 깊은 사정을 알기는 어렵다. 여기 얼핏 평범해 보이는 40대 중반의 인물들도 그렇다. 주희는 느닷없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있고, 호진은 자신이 투신해온 예술이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급해한다.
자신의 꿈인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10년을 일한 그녀에게 남은 건 지친 마음과 병든 육체 뿐이다. 그리고 여기,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극단을 힘겹게 이끄는 연출가 호진이 있다. 지난 세기의 유물과도 같은 호진의 아집은 새 시대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아내 주희와의 위기를 자신의 연극에 녹여낸다. 그것은 마치 호진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하고, 주희에게 띄우는 마지막 편지 같기도 하다. 과신했던 육신이 병들고, 성실하게 일구어 왔다고 믿어 온 삶을 부정해야 할 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오리무중의 이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