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고, 나는 너야”
세 달 전 교통사고를 겪은 세현은 세계 클라이밍 대회를 앞두고
회복되지 않는 컨디션과 경쟁에 대한 압박으로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고 당시 고장 났던 세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다름 아닌, 바로 '나'로부터.
연락을 주고받을수록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두 사람.
급기야 세현은 또 다른 세현의 임신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이후 악몽처럼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Review 피로 얼룩진 내 몸에서 피어나는
이번 꿈속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잠에 들곤 했다. 똑같이 긴 머리를 하고 있을까, 어떤 장소에 서 있을까.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라졌다. 머릿속은 가장 간절하던 때의 풍경을 착실히 구현해낸다. 어지러이 사위가 흐려지면, 발밑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두 눈이 살가죽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계속된 시도와 다양한 실패의 향연이었다.
클라이밍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오롯이 내 힘으로 높은 장벽을 향해 올라가는 스포츠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나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진짜 나만의 것. 아마 같은 이유로 클라이밍을 사랑하고 있을 여자가 있다. 얼마 전, 차 사고가 있었어도 훈련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열정을 가진 사람. ‘세현’에게 클라이밍은 단순한 취미 혹은 직업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그랬던 세현이 자꾸만 꿈을 꾼다. 이상하게도 꿈속의 ‘세현’과 세현은 연결되어 있다. 그쪽 세계의 세현이 소유한 것들은 이쪽 세현에게 없는 것들이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쥔 앙상한 손과 파우더 초크를 묻히는 굳센 손.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허상은 경계를 빠져나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두고 갔던 탯줄이 꿈에서 불쑥 나와 빨간 로프와 함께 세현을 끌어내린다. 예정에 없던 임신과 알 수 없는 괴이 현상은 이내 암벽과 연결된 로프를 끊어버린다. 아래로, 더 아래로. 가장 간절한 꿈이 추락한다. 지금도 두 삶을 사는 여성들이 끊임없이 암벽을 오르는 중이다.